2018. 2. 12. 19:43ㆍ어탐/글
최근에 공사를 하면서 방에 있던 짐을 모두 빼놓았다. 그 짐 사이엔 예전에 쓴 일기장도 있었다. 일기를 읽으면서 이게 진짜 내 글인가 싶었다. 내 글은 남의 것처럼 낯설고 당황스럽게 했다.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음에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과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때의 순간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여기에 과거를 반추하는 사람이 있다.
뱀파이어 사냥을 주제로 하는 말뚝 연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반복이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변주를 더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마셀린은 과거 사이먼을 만났을 때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또 그녀는 과거 엄마에게 꿈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과거에 죽였던 뱀파이어를 죽인다는 것 또한 반복이지 않은가. 제작진은 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 집중했던 걸까?
그거야 마셀린은 아직 과거의 일들을 다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유가 아니라도 우리는 과거에 의해서 현재, 현재에 의해서 미래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과거의 일을 반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인물의 성장을 보기 위해 과거를 반복해야만 했다.
마셀린에게 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뱀파이어는 그녀에게 영생을 주었다. 많은 이를 죽인 버섯 대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마음 한 편에 채워 넣을 수 없는 구멍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야만 했다. 뱀파이어를 사냥한 시점부터 그녀에게 있어 뱀파이어는 떼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몸속에서 죽은 채 살아온 뱀파이어들을 통해 마셀린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선 어릿광대(The Fool)는 마셀린의 장난기 어린 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장난기 어린 시절은 그녀의 전체 삶 중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출현하고 가장 먼저 사라진다.
여제(The Empress)는 마셀린의 외로움과 은둔을 상징한다. 마셀린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들어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노래로 드러낼 뿐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또 기둥에 묶여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햇볕을 쬐기 전 최후의 말로 자신의 일기장을 태워달라고 말한다. 이는 그녀가 과거에 대해 솔직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여제의 능력이 투명화인 점도 연관이 있다.
뱀파이어들 중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교황(The Hierophant)과 뱀파이어 왕이다. 이는 마셀린이 과거에 마지막으로 죽인 두 인물이기도 하다. 교황은 마셀린의 과거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교황이 부활했을 때, 뱀파이어 왕과 대립을 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고 현재를 역행시키려는 그의 고집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집착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다. 과거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마셀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교황과의 전투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독이 퍼졌을 때 꾸는 꿈 흥미롭다.
그녀는 두 가지의 꿈을 꾼다. 하나는 나이든 사이먼과 베티 커플이 빵을 굽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꿈, 다른 하나는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된 자기와 버블검에 대한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소망충족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를 마셀린의 꿈에 일대일로 대입하는 것이 틀릴지는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가 마음속 깊이 바라던 일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는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나이 들 때까지 사는 것 둘 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햇빛을 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꿈은 몹시 달콤했다. 하지만 꿈은 그녀를 병들게 할뿐이다. 그녀는 결국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주변을 본다. 그녀 옆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아직 그녀는 살아있고 끝마쳐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는 뱀파이어왕도 마찬가지이다. 뱀파이어 왕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으며 자신 몸속에 있는 뱀파이어를 정수를 제거하는 등 뱀파이어로서 개혁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몸속에서 정수를 뽑아내는 마셀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모험의 끝내 무언가를 이뤄낸 것으로 보인다. 이제 아침이 도래했고 모든 것이 다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순간의 실수로 고요한 아침은 어두운 구름으로 바뀐다. 죽을 위험까지 겪으면서까지 풀었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내 좌절한다. 이는 이전의 성장이라는 믿어오던 관념에서 벗어난다. 어린이 만화로서는 꽤나 우울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뱀파이어의 삶을 받아들인다.
마셀린은 자신이 원했던 일은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마셀린은 성장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모든 게 그대로임에도 그녀가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이 이전에 놓쳐왔던 과거의 한 영역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진정함에 대해 “실존적 상황을 명징하고 참되게 인식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책임과 가능성을 가정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는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에 한 발짝 다가갔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빈집에는 그녀뿐이다. 그녀의 주위는 이제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웠고 별들은 고요하게 빛난다. 그리고 엄청난 일을 겪은 그녀는 아직 살아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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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거미사이다의 'Stake의 뱀파이어들과 마셀린에 대한 단상'과
김혜리 기자의 책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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